2024. 2. 16. 09:58ㆍ종교/기독교 상식
1. 예배의 정의
예배(Worship)라는 말은 ‘가치(Worth) 있는 지위’(신분, Ship)에게 적절한 영광과 존경을 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예배는 오직 창조주(創造主) 시며(創造主) 구속주(救贖主)되신 하나님께만 그 합당한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 찌어다.”(시 96:8)라고 하였다. 이를 기초로 레이번 교수는 “예배는 진실로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와 존귀와 찬송과 사랑과 복종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으로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려드리는 수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런즉 기독교의 예배는 타 종교에서 행해지는 인간의 욕구 충족과 의식(儀式)적인 예배와는 다르다. 기독교는 예배의 대상이 확실하며 예배를 드려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 약속을 변개하고 식언(食言)하는 불완전(不完全)한 인간이나(민 23:19), 아무 이성 없는 짐승 또는 밝혀지지 않은 어떤 외계적(?) 존재가 결코 인간의 예배 대상이 될 수 없다.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빚으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 되신다.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찬송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당연한 창조 질서(秩序) 요(秩序) 법칙(法則)이다. 그런즉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사람 된 그 존재적 의미를 바로 찾는 것이요, 창조주의 그 창조 목적을 바로 실현하는 일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 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
(1) 성경적 예배 용어
성경에서 예배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표현에 차이가 조금씩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에는 거의 일맥상통하고 있다.
– 구약에 나타난 예배 용어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곁에 나타났을 때 아브라함이 “몸을 땅에 굽혀 영접한다.(창 18:2), 저희가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영접한다.(창 18:2), 욥이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욥 1:20) 등에 사용된 단어 ‘샤하이’(Shahai)는 ‘굴복하다’, ‘머리 숙이다’, ‘엎드린다’는 뜻으로 구약에만 120회 이상 나온다. 이는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행위를 나타냄으로써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순복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섬긴다는 뜻의 ‘아바드’(Abad)는 예배가 단순히 어떤 예식이 아닌 전(全) 생애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삶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듯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종(에베드)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곧 예배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뜻은 ‘봉사 한다’, ‘섬긴다’라는 말이며 이런 의미에서 유대인의 종교생활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일관되었다.
– 신약에 나타난 예배 용어
프로스퀴네오(Proskuneo) – 신약에 약 60회 정도 나온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받으실 때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고 하신 말씀과 또 예수께서 수가 성(城) 여인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라고 말씀하실 때에 사용된 단어이다. 그 뜻은 ‘무릎 꿇다’, ‘허리를 굽힌다’ 등의 존경을 표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라트레이아(Latreia) – 이는 예수께서 “다만 그 분만 섬기라.”고 말씀하시며 유혹하는 사단에게 최종 선언하실 때 사용하신 말이다. 이 말은 ‘종으로서 자신의 상전만을 섬겨야 할 신분’을 나타낸다.
레이투르기아(Leitourgia) – 일반적으로 예전(禮典) 또는 의식(儀式)과 관계되며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을 섬기고(빌 2:30), 예루살렘 교회에 연보로 섬기는 일(고후 9:12), 그리스도인의 구제(롬 15:16,27) 등이 바로 ‘레이투르기아’로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봉사(奉事)를 뜻한다.
호모로 기아(Homologia)이는 죄의 고백과 찬양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 가운데 시인(是認, Confess)이 이에 해당된다.
(2) 교회적 예배 용어
– 워십(Worship)
이 말은 ‘존경과 존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자’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최고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의와 권위를 인정할 때 사용되는 이 말은 영국에서 시장(市長)을 호칭할 때 ‘Your Worship’, 미국에서 ‘Your Honour’등으로 쓰이는 것에서 그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이 말이 종교적 용어로 예배를 지칭할 때는 바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경의와 권위가 함축되는 것이다.
– 컬트(Cult)
라틴어에서 유래한 종교의식을 나타내는 용어로 “어떤 것을 숭배한다.”는 의미와 이교적 배경의 주술적 요소가 있다. 이 말이 기독교에서 는 거의 외형적 예배 의식을 나타내며 주로 로마 가톨릭의 형식적(形式的)이고 의식적(儀式的)인 면에 사용되고 있다. 한 마디로 제의(祭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전통적인 종교의식뿐 아니라 심지어 이단 종파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워십’보다 ‘컬트’는 정형화된 어떤 예배의 틀과 형식을 생각하게 한다.
– 리터러지(Liturgy)
이 말은 예전적(禮典的) 의미를 가리키는 용어로 예전(禮典)을 나타내며 예배의 대부분이 미리 정해진 절차에 의해 드려져야 할 것임을 가리킨다. 세례식, 성찬식 등의 어떤 예식을 가리킬 때 이 용어를 사용하는데 보다 넓은 의미로는 예배의 모든 것을 의미할 때도 있다.
(3) 예배의 신학적 의미
기독교의 예배는 항상 하나님과 연관하여 이해되고 또 집행되어야만 한다. 예배가 곧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존경과 찬송을 드리는 것이므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 방법을 알지 못하고서는 바른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의 신학적 원리를 정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미의 ‘코람 데오(Coram Deo)’가 종교개혁의 한 구호가 된 것은 바로 이 예배 신학적 원리를 적시한 말이다.
– 오직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신 여호와 하나님
선지자 이사야는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사 40:25)라고 하였다. 또 주님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0)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어떤 것으로든 제한될 수가 없다는 뜻으로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 오직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에 집중해야 함을 말한다. 이는 하나님만 바라고 기대하고 나아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듣고 받아서 그대로 행하는 것으로 그 삶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즉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은 마음을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향하게 하는 수단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창조주시며 구속주(救贖主) 되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신전(神前) 인격의 삶을 사는 것이다.
– 예배 자는 오직 구속함을 입은 백성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예배자의 요건을 말한다. 또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자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고 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인 예배 자가 믿음이 없이는 참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또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요 4:24)라고 할 때 이는 예배자로서 요건(要件)을 말한다. 곧 예배는 아무렇게 멋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原則)을 따라 드려야 됨을 말한다. 이방인의 예배는 예배자의 필요와 감정이 기준이 되지만 기독교의 예배는 ‘하나님 중심’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오직 구속(救贖)함을 입은 자들만이 드릴 수 있다. 곧 그 안에 하나님의 영(靈)이 있는 자(롬 8:9)들이 드리는 예배다. 예배자의 필수 요건은 대략 다음과 같다.
-믿음(히 11:6 롬 14:3)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고백(요일 1:9 눅 18:3) 하나님은 자기 죄를 고백하는 세리와 같은 자를 찾으신다.
-회개(막 1:15 시 51:17) 하나님이 구하시는 예배는 통회하는 심령의 예배이다.
-기도(엡 3:15 시 17:1) 하나님은 정직한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
-청종(약 1:21 마 8:8) 말씀을 듣는 것이 곧 예배의 중심이다.
-찬양(엡 5:19 시 51:15) 여호와를 찬양함이 예배의 처음이요 끝이다.
-감사(시 50:23 엡 5:20) 여호와의 구속과 섭리를 감사함이 예배의 기초이다.
-거룩(시 96:9 레 19:2)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예배자도 거룩해야만 한다.
-화목(마 5:23,24) 예배하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목해야만 한다.
-희생(고전 5:7 히 9:26) 그리스도의 희생이 없이는 예배가 성립될 수 없다.
-구속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는 예배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신령과 진정’은 ‘영’(in spirit)과 ‘진리’(in truth)라는 말이다. 사마리아 인들은 지식이 없이 마음으로만 드리는 예배를 드렸고, 유대인은 지식은 있었지만 신령이 없는 예배를 드렸다.(요 4:22) 참된 예배가 되려면 신령과 진리로 드려야 한다. 신령과 진리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였다. 기독교에 있어서 진리(眞理)란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 또 ‘신령(神靈)’은 그리스도의 영(靈, 하나님의 영, 성령)을 말한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靈)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 8:10)고 말씀하였다.
그런즉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from) 예수님을 통하여(through) 하나님께(unto) 드리는 예배이다. 예컨대 오직 예수의 영(성령)을 가진 자들만이 드릴 수 있는 예배가 바로 기독교의 예배인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는 말씀은 곧 예수를 통한 받으심 직한 예배를 지적함이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통한 예배 행위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의 대속의 죽으심, 부활, 승천, 재림을 통한 죄 사함과 영생 그리고 영원한 천국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며(信望愛) 그 말씀에 응답’하는 삶을 말한다.
(4) 예배의 정의
이 같은 모든 의미를 종합해 볼 때 성경적 의미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존적(自存的) 자세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창조주만을 섬겨야 할 의존적(依存的) 존재라는 사실을 시인하고, 그 합당(合當)한 대상(對象)이신 하나님에게 경배와 복종의 생활이 자기 삶의 근본이 됨을 표시하는 것이다.
예배 신학자 깁스(Gibbs)는 예배를 정의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감사한 마음이 넘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영혼이 쉼을 누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훈(Paul Hoon)은 “기독교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람의 응답이다.”라고.” 하였고 헉스터블(Huxtable)은 “예배는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의사소통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알아 그 하나님께 감사(感謝)와 사랑(愛情)을 표시하며 자신을 하나님 앞에 헌신(獻身)하는 것이다.
즉 개혁교회의 예배는 “지존 무상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榮光)과 위엄(威嚴)과 존영(尊影)과 거룩의 본질적 가치 앞에 피조물이 엎드리고, 따르며, 섬기게 하고 그 말씀에 충성(忠誠)을 맹약(盟約)하며,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글 쓴 이 / 현영훈 목사(고려신학교 연수원)
2.좋은 예배란 무엇인가?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고,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가장 큰 계획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예배를 잘 드려야 한다.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책임이며 의무이다.
교회의 영적 능력과 영향력이 점점 약해져 가는 지금 이 시대에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우리의 본분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것이 얼마나 긴급하고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드리는 예배가 좋은 예배인가? 성경적인 기초와 예배의 본질을 가지고 9가지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1.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 돌리는 예배
예배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무엇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모든 예배의 순서는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찬양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의미가 강한 ‘수직적인(Vertical) 찬양’이어야 하고, 기도의 내용도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내용이어야 한다. 말씀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지, 또한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는지의 메시지가 선포되어야 한다. 우리의 예배는 계속해서 이러한 강한 목적을 가지고 드려야 한다.
이사야 43:7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그리고 고린도전서 10:31의 말씀 또한 같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가장 좋은 예배는 예배의 목적과 본질에 충실한 예배이다. 예배를 준비할 때마다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 돌릴까?’고민하고 ‘왜 예배를 드리는가?’를 생각하라.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2.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끼며 하나님을 경험하는 예배
예배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부르셔서 나아가는 자리이다. 우리의 의지와 선택 이전에 하나님께서 예배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인정하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부르신다는 그 소명에 응답하며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모든 예배 속에서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강력한 선언과 고백이 뒤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찬양을 부를 때나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고, 말씀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순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성찬 가운데 떡과 포도주를 떼고 마실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다시 한번 결단할 수 있어야 한다.
엘리사와 엘리야는 그의 전 생애에 항상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첫째로 기억하며 사역을 감당했다. 성경에는 많은 부분 그들의 확고한 고백을 읽을 수 있다.
“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 아합에게 보이리라”(왕상 18:15)
예배를 드리는 모든 시간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강렬한 믿음의 고백이 넘칠 때, 그 예배는 요한계시록 4-5장의 천상의 예배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 실이시라 하고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8-11)
3. 예배의 순서가 성경적이며, 낭비가 없는 예배
예배의 순서가 성경적이란 말은 성경에서 검증되고 인정되는 예배의 요소들을 실제적인 예배에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종교개혁의 중요한 모토였던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은 중세시대 가톨릭의 대한 단순한 항거가 아니라 인본적이고 불필요한 의례적 교회와 형식적인 예배에 대한 강력한 개혁이었다. 당시의 예배는 비성경적인 요소들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욕구에 의해 예배가 복잡해지고 형식적이 되고 말았다. 한 마디로 예배의 순서가 비본질적인 요소들로 인해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한국예배의 특징 중 하나는 순서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보다 더 강하고 깊은 예배의 중요한 키는 단순한 예배이다. 찬양과 말씀, 기도, 성찬을 중심으로 단순화시킬 필요가 있다. 단순하다는 것은 단지 순서 하나를 빼는 것이 아니라, 인본주의적인 예배의 순서들을 모두 버리고 성경의 예배요소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보다 집중할 수 있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 군더더기 순서들을 과감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다음 세대들은 갈수록 많은 순서와 복잡한 예배로 인해 점점 더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주일 1시간 남짓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만 집중시킬 수 있는 순서들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적으로도 낭비가 없는 예배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4. 말씀이 복음적이며, 영적 능력이 나타나는 예배
최근 성장하고 있는 예배를 참석하다 보면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말씀이 복음적이라는 것이다. 말씀이 인간적인 세속의 요소가 들어가 있지 않으며, 사람을 만족시키거나 자극하는 흥미롭고 드라마틱 한 요소도 없다. 단순하고 밋밋한 것 같지만 말씀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면에서 우리의 설교는 좀 더 복음적이어야 하고, 구원의 노래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좀 더 확실하게 선포되어야 한다.
브라이언 채플(Bryan Chapell)은 그의 책 ‘그리스도 중심적 예배(Christ-Centered Worship)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는 사명이 있다. 하나님은 복음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가 하는 예배는 이런 성경적인 목적을 계획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의 전달을 우리 예배의 틀과 초점으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가 따르는 의식들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사라지고 형식적인 경건만이 자리할 뿐이다”라고 했다.
끊임없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말씀과 복음에 대한 확고한 선포만이 성령의 강력한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다. 그분만을 전하고 증거하면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나타나시고 역사하신다.
5. 예배가 인위적이지 않고 성령의 음성에 순응하는 예배
좋은 예배의 특징 중 하나는 예배에 있어 사람의 주관적이고 인위적인 요소가 적다는 데 있다. 예배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예배의 참석자가 많든 적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2년 전 미국 LA 할리우드 근처에 위치한 “리얼리티 엘에이(Reality LA)” 교회를 방문했을 때 나는 예배가 자연스러울 때 얼마나 시간이 빨리 가는지를 경험할 수 있었다. 2시간 가까운 예배는 마치 1시간이 채 안 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하심을 찬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노래와 복음적인 말씀, 그리고 보혈의 찬양으로 이어지는 성찬식이 마치 하나의 커다란 메시지란 느낌을 받았다.
예배를 자연스럽게 하나의 덩어리가 되게 하는 방법은 모든 예배의 요소와 순서가 일체감을 갖고 유기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예배의 요소들 즉 찬양과 말씀, 기도, 성찬의 주제가 하나가 되는 흐름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 예배의 주제들을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하나님의 살아계심’, ‘구원의 은혜와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공생애, 죽으심과 부활, 재림에 이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보혜사 성령님과 능력’
우리의 예배가 이러한 본질에 집중하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은 성령님의 역사이다. 우리는 예배 속에서 너무 많은 것을 말하려고 하고, 나타내려고 하지만, 그것들은 성령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한 요인이 될 뿐이다.
6.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예배
가장 좋은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뚜렷이 나타나는 예배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나타내는 실제적인 현장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역, 죽으심 그리고 부활의 노래가 드러나는 시간이다. 예배 1시간 속에서 우리의 찬양, 말씀,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살아계심을 선포하고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형식적인 예배에 불과하다.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예배는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에 불과하다. 예배의 모든 순서는 확연히 그리스도의 복음이 재현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이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예배 속에서 확실하게 경험돼야 한다. 즉 이것이 살아있는 예배이다.
현대 예배학의 거장이자 존경하는 로버트 웨버(Robert E. Webber)박사는 “예배학(Worship Old and New)”에서 예배의 중심 내용은 그리스도이어야 함을 다시 강조했다.
“예배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삶, 죽음, 부활, 그리고 궁극적 성취이다. 예배란 성자께서 성취하신 구속 사역을 인해 성부께 찬양하는 것이며, 말씀과 주의 만찬을 통해 이 사역을 재연하는 것이다.” 2
교회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으심, 부활, 재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말씀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를 콘스탄스 체리(Constance M. Cherry) 교수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그리스도이시고, 예배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이야기이고, 기독교 예배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우리의 주님이자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예배의 신성한 승인은 우리가 주의 성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 사건은 예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기리는 것으로 이끈다. 히브리 예배와 같이 기독교 예배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부터 나왔다.” 3
우리의 찬양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찬양해야 하고, 말씀은 보다 선명하게 하나님의 구속하심을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예배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본질이다.
7. 종말론적 메시지로 승화되는 예배
한국교회의 예배 속에서 약화되어 가는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종말론이다. 나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에 대한 찬양과 말씀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초대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모임의 주제 중 하나는 종말론적 사고였다. 그들은 모일 때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번 뜨겁게 인정하고 결단하고 기대했다. 그리고 그것이 초대 교회 공동체를 유지시키고 강하게 만드는 원천 중 하나였다.
한동안 이단들이 종말론을 가지고 많은 이들을 미혹하게 하다 보니, 많은 교회에서 종말에 대한 메시지에 민감하게 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가 영적으로 하나가 되고, 우리의 예배가 좀 더 강력해지려면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재림에 더 무게를 둔 찬양과 메시지가 지금보다 더 많이 선포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공동체를 더욱 결속시키고 세상 속의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중요한 결단의 메시지가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분증 같은 의미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얼마나 소중한 자격인가를 일깨워주는 상징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 4:14-17)
그러므로 예배의 마지막 찬양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이 선포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엘리야 때처럼 주 말씀이 선포되고 또 주의 종 모세의 때와 같이 언약이 성취되네 비록 전쟁과 기근과 핍박 환란 날이 다가와도 우리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 주의 길을 예비하라 보라 주님 구름 타시고 나팔 불 때에 다시 오시네 모두 외치세 이는 은혜의 해니 시온에서 구원이 임하네
에스겔의 환상처럼 마른 뼈가 살아나며 또 주의 종 다윗의 때와 같이 예배가 회복되네 추수할 때가 이르러 들판은 희어졌네 우리는 추수할 일꾼 되어 주 말씀을 선포하리
우리가 다시 사는 것만큼 강력하고 귀한 선물은 없다. 세상의 어느 종교와 집단도 그렇지 못하다. 예배 속에서 이전보다 더 강력하게 종말론적 고백과 결단이 나타나야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영적 영향력을 끼칠 때이다.
8. 찬양과 기도, 말씀이 균형을 이루는 예배
한국 교회 예배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는 설교 중심의 예배이다. 설교 지향주의 예배는 그동안 한국 교회 예배가 역동성을 사라지게 만드는 한 원인이 되었다. 젊은이들은 점점 예배에 흥미를 잃어가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고, 예배를 강론이나 설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그 딱딱함으로 인해 점점 감동을 주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예배의 중요한 성경적 요소들인 찬양과 기도, 말씀과 성찬 등이 유기적으로 예배 속에 녹아질 때, 예배는 보다 강력한 영적인 동력을 회복하게 된다. 하나님을 만나는 서로 다른 통로들이 더 많은 예배자들을 집중하게 만들고 깊이 있게 만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찬양을 통해 감동을 주셨고, 기도로 더욱 깊이 대화할 수 있는 통로가 되게 하셨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다시 한번 결단할 수 있도록 하셨다.
9. 다음 세대를 준비하며 기대하는 예배
교회의 중요한 책임 중 하나는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이다.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는 정말 많은 희생과 열정이 필요하며, 교회의 사명이다.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가는 중요한 영적 기초가 되어야 한다. 많은 비용과 대가를 치러서라도 청년들과 학생들, 어린이들을 위한 비전을 제시하고 투자해야 한다.
교회가 이 세상 마지막 때의 희망이라 한다면, 예배는 영적 보루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언제나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할 수 있는 리더들을 키워내고 준비해야 한다. 그 리더들을 영적으로 양육하고 훈련하는 데 중요한 것은 바로 예배이다. 예배를 통해 다음 세대들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교회의 책임이고 교회 리더들의 의무이다.
많은 교회가 지금의 장년들에 초점을 맞춰 예배를 준비하고 순서들을 만들어간다. 나는 예배가 새롭게 되어야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다음 세대들 때문이라 생각한다. 예배 속에서 구체적으로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찬양 선곡에 있어서 지금 장년들이 아는 찬양만 할 것이 아니라, 조금 알지 못하는 찬양이라 하더라도 청년들과 학생들이 선호하는 찬양을 부르는 것은 다음 세대를 위한 조그마한 배려이다. 이 작은 배려가 다음과 다음을 연결하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조그마한 징검다리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변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후퇴하는 것이다. 예배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가진수 / 한국교회 예배의 갱신과 변화
미국 LA에 위치한 월드미션대학교(World Mission University) 예배학 석사과정(M. A. in Worship Studies)의 학과장이자 교수로 ‘현대 예배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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